준최선의 롱런

🔖 나는 '세상은-'으로 시작하며 내뱉는 문장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세상이라는 말이 너무 크게 들리는 까닭이다. 인류를 사랑한다는 말은 아무도 안 사랑한다는 말이고 자식을 글로벌 인재로 키우겠다는 말은 아무것도 아닌 인간으로 키우겠다는 뜻이니까. '세상을 위해서'라는 말도 내게는 텅 비게만 느껴지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구체적인 사람은 연민할 수 있어도 세상을 연민할 수는 없는 인간인가 보다.

대신 아주 구체적으로 말하면 알아듣기 편하다. “걔는 허벅지에 작은 점이 두 개나 있는데 나는 알고 걔는 몰라”라든지 “내가 사랑한 사람은 분홍 핸드백 깊은 곳에 숨기고 다니는 데오도란트 같은 존재였지” 따위의 디테일을 얘기해 줘야 그 사람을 상상할 수 있다. 너무 크게 말하면 들을 수 없게 되나 보다.


🔖 딱히 갖고 싶지 않아서 괜찮다고 말했을 뿐인데, ‘얘는 조르질 않네’하고 어른들에게 칭찬받는 상황을 즐겼다. 또 하나 즐긴 게 있다면 야매 그림이다. 엄마 친구 집에 놀러 가면, 나는 방에서 그림을 그렸다. 방에는 그림이 많았다. 나는 사진이나 그림을 종이 아래에 놓고 테두리를 따라 그릴 수 있었다. 대고 그린 그림을 가져가 보여 주니, 엄마와 엄마 친구들은 내가 그림에 재능이 있다며 칭찬했다. 나는 종이에 대고 그렸다고 고백하지 않았다. 그들의 관심과 사랑을 즐겼다. 대고 그렸는데 내가 그렸다고 칭찬받는 것을, 안 갖고 싶을 뿐인데 욕심이 없다고 칭찬받는 상황을. 나는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도록 놔두었다. 사랑이 전적으로 오해에 기반하도록 방치했다.

그래서 누가 나를 사랑하면서 동시에 오해하는 것을 개의치 않는 어른으로 자란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나의 사랑이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건지도 모르겠다. 어른이 된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로서 사랑받는 것을 욕망할 줄 모르는 인간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이해받는 것과 사랑받는 것이 조화를 이룬 적 없었기 때문에, 둘 중 이해 받는 쪽을 자연스럽게 포기해 왔던 것이다.

사랑받으면 장땡이지, 하는 생각으로. 시나 일기, 내면의 것을 토해낸 것으로 누군가에게 사랑을 받는 것은 여전히 어색하다. 나는 누군가 그런 식으로 나를 사랑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이 뒤틀리고 왜곡된 사랑법은, ‘나를 알면 상대가 떠날 것’이라는 불안에 기반한 중증의 방어 기제인 동시에 ‘네가 나를 알아볼 리 없다’는, 타인의 이해력을 신뢰하지 않는 오만함에 기반한다.

(이 부분이 너무 공감되어서 적어놓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받은 사랑은 전부 오해였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사랑했다. 나는 종종 내 진짜 나를 사랑해 달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 가짜 나에 대해 감탄해 줘, 내가 만들어낸 모습대로 마음껏 오해해줘. 그러면 나에게 반하게 될 거야. 근데 이제는 그런 생각도 또 든다. 그게 뭐 어때서?)


🔖 피로회복은 비대칭적 권력 구도를 뜻하는 두 장의 카드를 무시할 수 없었다. 순간, 그는 자신이 어떤 기대를 품었다는 사실을 상대방이 역겹게 생각할까 두려워졌다. 그리고 사랑은 내가 타인에게 역겨워질 매 순간에 대응, 반발하며 자신의 내면을 지혈하는 일련의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자 모든 걸 놓아 버리고 싶었다.